[음악도시 인천으로 가는 여정]프롤로그. 50년 전 국내 최대 미군기지 모인 뮤지션…음악도시로 출발이었다 (인천일보. 2021. 6. 9)

▲ 지난해 철거된 부평 신촌 미군전용클럽 '드림보트'의 1969년 모습.. 출처 : 인천일보(http

청년밴드 연주 유일 수요 미군 따라
미군클럽에 자리잡고 생소한 스윙·재즈 악보없이 연주
새 리듬 수용·모방한 한국대중문화가 K팝 이어져

작년 미군클럽 ‘드림보트’ 철거 등 빛 잃은 ‘음악도시 인천’
가치 다시 빛낼 이정표 세운다

▲ 1960년대 부평 애스컴시티 미군기지 표지판.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헝가리 문학사가 게오르크 루카치가 한 말처럼 인천시 역시 시의 밤하늘이 별처럼 환히 빛나기를 바라며 음악도시 인천을 선언했을 것이다. 음악도시 인천으로 가는 대장정을 시작했고 한창 진행 중인 즈음, 음악도시 인천이 나아가야 할 밝은 길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 지난해 철거된 부평 신촌 미군전용클럽 ‘드림보트’의 1969년 모습.

 

▲부평에서 쏘아 올린 공

50년 전 인천 부평은 이미 음악도시로서 태동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음악의 에너지를 가지고 한국 문화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끌어내는 곳이었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부평에서 시작한 음악을 새로운 리듬을 받아들이고 모방해 현재 방탄소년단으로 대표되는 케이팝(K-pop)으로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군기지에서 소비한 음악

1960년대 한국 청년 밴드 연주자들이 인천 부평에서만 모여서 활동한 것이 핵심적인 원동력이었다.

한국 청년 밴드 연주자들이 부평 삼릉에 옹기종기 거주했던 이유는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50년 전 한국 청년 밴드 연주는 주한 미군이 유일하게 소비했고 찾았다.

현재 부평구 전체 땅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큰 규모 애스컴(ASCOM: Army Service Command, 미군수지원사령부)미군기지가 있었다. 캠프 마켓(Camp Market), 캠프 그렌트(Camp Grant), 캠프 테일러(Camp Tayor), 캠프 타일러(Camp Tyler), 캠프 아담스(Camp Adams), 캠프 해리슨(Camp Harris), 캠프 하이에스(Camp Haye) 7개 캠프로 구성된 애스컴시티 미군기지에는 미군들을 위해 클럽들이 1970년대 초반까지 22군데나 있었다. 장교 클럽, 부사관 클럽, 사병 클럽으로 구분됐다. 미군들은 일과가 끝나는 저녁 시간에 클럽이 오픈하면 무대에는 한국 청년들로 구성된 밴드 연주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1960년대 초에 미8군 픽업 장소는 지금 부평삼거리역 근처 명신학원 입구 쪽에 있다가, 조금 뒤에 동수역 3번 출구 쪽으로 이전했다는 이야기는 1961년 무렵 가수 배호가 애스컴시티 서비스클럽에서 드럼을 치고 있을 때 배호로부터 드럼을 배웠던 동갑내기 박현호 선생(1942년생·애스컴시티 미군기지에서 밴드 활동·드러머·제물포고)의 2018년 증언을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1961년 배호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부평 삼거리 명신학원 들머리 쪽의 ‘ㄷ’자 한옥에 살았다는 사실도 박현호 선생이 밝혔다.

 

▲배호의 음악성, 인천이었기에 가능

한국대중음악사에 새로운 감성으로 등장한 배호가 부평 애스컴시티미군기지 서비스클럽에서 미군들이 당시 즐겨 들었던 재즈, 스윙 등을 연주한 드러머로 활약한 사실에 앞서 우리나라 가요를 기반을 둔 일본 엔카와는 다른 풍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미군클럽에서 스윙과 재즈를 연주한 밴드 연주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대중음악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연주기법이 부평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분위기는 부평 삼릉에 나고 자란 부평 토박이들 기억 속에 생생하게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삼릉에 거주한 미8군 오디션 통과 뮤지션들이 낮에는 밴드 구성들과 모여서 미군클럽에서 연주할 곡들을 수십 번 반복해서 듣고 악기별로 채보해서 연주 연습을 했다. 당시로써 명백히 생소한 스윙과 재즈 리듬을 악보 없이 소리를 듣고 옮겨 적어 미군클럽에서 미군을 상대로 생생하게 연주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고 엄청난 창작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다양한 연유로 부평 삼릉은 미8군 오디션 통과 한국 청년 뮤지션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연주 연습을 하면서 한국에 스윙과 재즈 등 새로운 리듬을 가장 먼저 채보해 밴드 악기로 연주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장소였다.

▲ 1966년 에스컴시티 항공사진(성기창 사진가)

▲사라지는 부평 음악의 산물들

부평 신촌(부평3동)에는 미군부대 밖 민간지역에서 미군 전용 클럽이 22개나 운영된 규모 면에서도 우리나라엔 이런 곳이 없다. 최근 경기 파주에 있던 미군전용클럽 ‘라스크 찬스’가 경기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사실 조용필이 무명 시절에 밴드 활동을 한 미군클럽이라서 유명해졌다.

반면 부평 신촌에서 오랫동안 원형을 보존해 온 미군전용클럽 ‘드림보트(Dream Boat)가 지난해 철거됐다. 드림보트는 백인 군인만 드나들었던 곳이다. 당시 미국에서 유행했던 최신 음악을 연주하고 들려줬던 드림보트가 한국대중음악사에 기여한 바를 생각하면 아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인천 부평에서 문화 가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일이어서다. 특히 경기도 ‘라스트 찬스’의 근대문화유산 지정과도 대조되며 뼈 아픈 과오를 남겼다.

 

▲이미 음악도시였던 인천, 꽃 피워야

인천은 이렇게 음악도시로서 위용을 떨쳐낸 역사와 문화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도시다. 다만 아직 훼손되지 않고 사그라지지 않은 불씨를 살려낸다면 인천이 바라는 음악도시 인천이 빛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왜 인천이 음악도시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방점을 둬야 한다.

한국대중음악사는 인천 부평이라는 찬란한 별빛 속에서 새롭게 쓰였고 풍성했다. 휘양찬란한 그 위대함은 이름 없는 숱한 미8군 오디션을 통과한 한국 청년 뮤지션들이 부평 삼릉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낮에는 악보 없는 스윙과 재즈 리듬을 수차례 반복해서 듣고 음을 채보해 악보를 만들어낸 작업에 없었다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일 것이다.

먼저 매일 저녁 악기를 들고 ‘제무시’ 픽업 트럭에 몸을 실어 미8군으로 출근한 한국 청년 밴드 뮤지션들을 기억하고 끄집어내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50년 전 이미 인천은 ‘음악도시’ 였다. 그러나 그 별빛은 시간이 지나면서 빛을 잃었고 희미한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기록마저 없다면 음악도시 인천은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이 연재에서 앞으로 한국대중음악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쌓은 부평의 가치를 되새기고 ‘별이 빛나는 음악도시 인천’으로 가는 이정표를 제시하고자 한다.

/글·사진 이장열 애스컴시티뮤직아트페어 대표·문학박사

/정리=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인천일보-애스컴시티뮤직아트페어 공동기획

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9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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