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의 한국 첫 전파지 부평 삼릉'(예술인천 35권호) 2023년 7월 23일

by 이장열 애스컴시티뮤직아트페어 대표/문학박사

1. 절망에 빠진 인류의 발명품 키치…돌파구를 찾다
BTS는 한류의 상징으로 인식이고, 그 여진은 이어지고 있다.
이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까닭을 지금의 10-20대에게 질문을 던지면 답이 나온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지만 역동적으로 몸짓과 감미로운 멜로디가 우리들의 마음을 잘 표현했어 좋아한다.”
사실 이 언급도 너무 복잡한 언설이다.
가볍게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이것 BTS 인기의 원천으로 보면 될 것이다.
19세기 이후에 본격 등장한 대중음악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폭발적으로 주류 음악으로 자리잡게 된 동력이 바로 가볍고 쉽게 어디서나 형식이 구애 받지 않고 약간의 돈을 지불해서 즐길 수 있기에 가능해진 것이다.
대중음악이 짧은 기간에 전세계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 데에는 전자악기에서 나오는 음을 전기 앰프와 연결해서 증폭시킨 것이 핵심 요소였다. 전기를 통해서 작동하는 축음기, 음반, 앰프, 라디오, TV 등이 싼값에 대중들이 구입할 수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이 전세계에 구축되면서 대중들이 좋아하는 대중음악이 급성장하게 된 것이다.
20세기 초입에 가볍고 단순하면서 복잡하지 않은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는 것는 신인류가 자본주의 시스템과 과학기술의 진전에 힘입어 탄생하게 되었다.
1, 2차 세계대전을 연이어 껵은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새로운 미래가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와 절망감에 좌절했다. 이런 분위기는 문화예술에도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특히 미술에서 가장 반응을 보였다.
기존 질서에 대한 해체와 새로움을 추구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세대들의 반응들이 예술문화에서는 ‘키치’로 규정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키치는 기존 것에 대한 해체적 인식론에 기반한 방법론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마르셀 뒤샹이 그 시대의 절망감을 예술로 표현했다.
“이제 회화는 망했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겠어? 말해보게, 자넨 할 수 있나?(1912)

그림 1. 마르셀 뒤생 ‘샘'(1917)

더 이상 창조할 수 없다는 미래가 없어진 세대들에게 엄습한 절망감을 마르셀 뒤샹은 ‘샘’ (1917)작픔으로 드러냈다.
문학에서도 근대소설에서 현대소설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그런 시도를 볼 수 있다. 시간이라는 틀, 곧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의 일관성이 무너뜨리는 시간 파괴를 통해서 새롭게 뭔가를 만들어내는 흐름이 있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시간의 흐름을 파괴하면서 무기력에서 빠져나오려는 시도였다.  이것이 키치라는 인식론에 기반한양식으로 볼 수  있겠다.
키치는 절망에 빠진 인류가 만든 발명품이다. 인류가 미래 없음이라는 절망이라는 벽에 작은 구명을 내고 막힌 벽을 뚫는 돌파구로서 키치는 자리잡는다.

2. 키치적인 부평 삼릉의 미8군 오디션 통과 한국 청년 밴드..애스컴 미군기지
한국에서도 키치는 시작됐다. 그것도 부평 삼릉에서 미군 클럽 픽업 밴드에서부터 시작됐다.
20세기 한국에서 가장 절망적인 상황은 1950년 6.25한국전쟁이다. 절망과 공포에 휩싸인 당시 젊은 한국 청년들 세대들에게 돌파구는 역시 키치였다. 6.25전쟁 발발로 참전하는 미군들이 들고 온 문화 양태들은 한국 청년들에게는 새로운 문화 충격이었다. 미군은 전장 중에도 라디오를 틀어 놓고 듣고,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들으며, 유명한 연예인들이 위문 공연 형태로 음악과 춤을 미군들에게 선사하는 행위를 보면서 한국 청년들은 충격을 느꼈다.
한국 주둔 미군의 문화를 특히, 음악 분야에서 가장 먼저 가장 두드러진 키치 행위로 자리잡았다.  미군 문화 따라하기, 흉내내기는 대중음악에서 가장 먼저 선도해 나갈 시스템이 부평 삼릉에서 작동했다.
부평 삼릉에는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미군기지 애스컴이 운영되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서 부평 조병창 시설을 점령하고 있던 인민군들을 격퇴한 후, 미해병대 1개사단이 주둔하고, 1953년 한미방위조약이 체결이 된 부터부터는 부평은 미군 7개 캠프로 확장 구성된 애스컴 미군기지가 운영된다. 이 미군기지는 197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었다.
부평 애스컴 미군기지는 주한미군은 미8군단 소속이다, 본부는 서울 용산에 사무실이 있었고, 부평 애스컴 미군기지에 전략 자산과 부대들이 모두 집적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에 주둔한 미8군은 미군 여가를 위해서 주둔지에 영내 클럽을 공식 운영했다.
클럽은 장교클럽, 부사관클럽, 사병클럽으로 구분해서 운영했다. 클럽은 일과시간이 끝나는 오후6시부터 열어서 자정에 문을 닫았다.
클럽은 음악 연주가 가능하게 무대가 있게 설계됐다. 매일 밤 미군 클럽에서 연주자들이 필요했다. 미군클럽 연주 밴드는 한국 청년들이 도맡았다.
미8군 용산에 있는 미문화원에서는 6개월에 한번씩 미국인 7명이 한국 청년으로 구성된 밴드들을 대상으로 클럽에 픽업될 밴드들의 오디션을 봤다. 오디션은 등급은 A. B. C. D로 구분했다. D는 탈락이고, A급은 최상위로 가장 많은 공연료를 지불했다.
오디션에는 자유곡 1곡, 지정곡 3곡을 연주해야 한다. 지정곡은 오디션 자리에서 심사위원들이 무작위로 정해서 참가 밴드들에게 던져주기 때문에 악보도 제대로 없는 시기에 한국 청년들은 죽자살자 연주 연습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오디션 지정곡은 미국에서 당시 유행하는 재즈, 스윙, 블루스, 컨츄리 곡들이어서 한국 청년 밴드들에게는 새 리듬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기회로 자리잡았다.
부평 애스컴미군기지에도 24군데의 클럽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 클럽에서 연주할 한국 청년 밴드가 많이 필요한 때였다. 게다가 오디션 통과 한번으로 모든 게 패스되는 구조가 아니었다. 6개월마다 미군클럽에 나갈 밴드들은 똑같이 오디션을 보는 시스템, 곧 연예기획시스템이 구축되어서 밴드들의 실력이 녹슬면 바로 무대에 설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결국 이런 오디션 시스템으로 실력을 쌓은 한국 1세대 청년 밴드들이 한국 대중음악에 새로운 기운을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한국 청년들의 목숨마저 위태롭고 절망감이 엄습하고, 먹고 살 기회조차 막혔던 한국 청년들에게 미8군 오디션을 통과해서, 큰 공언료를 지불받는 미군클럽 밴드 연주자로 서는 일은 ‘꿈의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나 진배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한국 청년들은 악보는 없는 미국 최신 음악을 라디오와 빽판을 쉼 없이 반복해서 들어서, 음을 하나하나 따는 채보로 블루스와 스윙 곡을 반복해서 맹렬하게 연습해서 꿈의 무대에 올라가고자 했다. 이런 음악 분야의 키치 행위가 부평 삼릉에서 가장 먼저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런 시스템이 유일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미8군 오디션을 통과한 한국 청년 밴드들은 당시 ‘화양’, ‘유니버셜’ 등 기획사에 소속되어 활동한 최초의 계약 밴드로서 미국의 연예기획사를 모방해서 구축된 시스템으로 움직였다.
오디션 통과 한국 청년 밴드들은 미8군이 직접 미군클럽으로 이동시켰다. 그 픽업장소가 부평 애스컴시티 미군기지에 있던 부평 삼릉이었다. 부평 애스컴시티 미군기지가 축소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기까지 픽업 장소는 부평 삼릉, 옛 경인가도에 오후부터 미8군 지무시(GMC) 트럭이 즐비해서 한국 청년 밴드들을 실러 날랐다.

그림 2. 부평 삼릉 동수역 ‘미8군 클럽 음악인 픽업(Pick Up)장 -부평 삼릉(三菱)” 표지판

한때 부평 삼릉에는 미8군 오디션 통과 한국 청년 뮤지션들이 300여 명이나 모여 거주하면서 미군 클럽 연주 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부평 삼릉에서 펼쳐진 풍경은 이랬다고 한다. 낮에는 집에서 쉬면서 여기저기서 밴드 연주자들의 악기 연주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키치 행위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이뤄진 곳이고, 미국의 음악을 흉내내고 모방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서면서, 한국적인 정서를 미국의 블루스와 스윙 리듬에 가미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낸 밴드 출신으로는 부평 애스컴시티 미군기지 서비스클럽에서 드러머로 활동한 가수 배호 등이 있다.
배호는 1960부터 1962년까지 부평 애스컴 미군기지 서비스클럽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면서 스윙, 블루스 등 미국에서 파생된 리듬을 흉내개고, 모방해서 연주한 키치 경험을 통해서 한국 대중음악에 독특한 창법과 리듬감을 새롭게 선사하게 된 것이다.
미8군 오디션 통과 한국 청년 밴드이 집단적으로 거주한 부평 삼릉은 한국에서 키치 행위가 가장 먼저 이뤄진 장소이고, 이런 기회와 계기로 절망감에 빠져 희망이 사라져버린 한국 청년들에게 새로운 꿈을 키울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이들은 한국에 그동안 없었던 대중음악을 만들어냈고, 그 전까지 민요, 엔카 위주의 음악시장을 미국의 대중음악시장으로 급속하게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 키치적 부평 삼릉, 절망을 희망으로
이젠 한국 대중음악사는 그 뿌리를 부평 삼릉 거주 한국 청년 밴드에서 찾았으면 한다. 절망이라는 벽을 뚫고 돌파구를 찾는 키치 행위에서 비롯된 클럽 밴드의 출발점이 부평 삼릉이라는 것도 이런 점네서 바라봐주었으면 한다.
부평 삼릉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미8군 오디션 통과 한국 1세대 청년 밴드들을 한국 문화예술계는 기억해야 한다는 필자의 생각이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 실용적인 특성을 버리고 새로운 목적과 시각에 의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창조된 것이다.” – 마르셀 뒤샹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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